[중동포커스]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
I. 서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 해체 이후, 학계에서는 미래 국제 질서 변화에 대해서 다양한 담론들이 오갔다. 냉전 체제가 종식됨에 따라 후쿠야마(1989)와 같은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이념으로 자유 진영이 공산 진영으로부터 사상적 경쟁에서 승리했고, 이에 더 이상 인류는 이념적 진화를 멈출 것, 즉 “역사의 종언”이라는 낙관론을 펼친 바 있다(Fukuyama 1989). 냉전에서 서방이 승리함에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는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이 대두될 즈음 후쿠야마의 스승이자 미국의 정치학자인 헌팅턴(1993)은 탈냉전 이후 시기에 국제 정치를 지배할 패러다임으로 문명 간의 갈등을 제시했다(Huntington 1993).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의 충돌” 테제는 국제 정치에서의 갈등 양상이 이념이 아닌 지배적 문화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명 간의 대립일 것임을 강조했으며, 이는 탈냉전 이후 발생한 패러다임 공백을 적절하게 메꿀 것처럼 보였다. 2001년 9월 11일, 사상 초유의 미국 본토 습격 사건인 9ㆍ11 테러 발발 이후 헌팅턴의 이 문명의 충돌 논제의 신빙성은 경험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더 강화되게 되었다.
본고는 『문명의 충돌』 담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1993년 헌팅턴이 Foreign Affairs에서 발표한 논문 “문명의 충돌?”과 이후 이것을 더 정리ㆍ발전해서 1996년에 출간한 저서 “문명의 충돌”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하여 문헌적으로 분석했다. 1993년 논문에서 헌팅턴은 중국 및 한국 등의 문명권을 “유교(Confucian)” 문명이라고 한 것을 1996년 저서에서 “중화(Sinic)” 문명이라고 수정한 것처럼, 3년 사이에 모델에 변화를 주기는 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두 문헌을 함께 “문명 패러다임”으로 정의하고 분석했다.
II 장에서는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패러다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그 내용을 정리했다. 헌팅턴이 문명 패러다임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주된 생각에 대해 살펴본 이후 III장에서 과도한 일반화, 문명ㆍ문화적 요소 과대평가, 정치인들의 도구로서의 악용이라는 총 3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시도했다.
II. 『문명의 충돌』이 제시한 패러다임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이라는 개념의 집합체들이 충돌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는 영국의 동양학자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가 먼저 언급한 것이었다. 1957년, 루이스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진행한 연설을 통해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른 이슬람과 서구권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이스의 주장은 당시에는 큰 파장을 얻지 못했는데, 1950년대 당시 서구권이 상대해야 할 가장 큰 존재론적 위협은 공산 진영의 리더인 소련이었기 때문이다(Haynes 2017, 67).
이후 헌팅턴은 루이스의 논제를 더 확장 및 발전시켜서 탈냉전 이후의 국제정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헌팅턴은 이후 새롭게 등장할 세계에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상적이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일 것이라고 했다. 헌팅턴은 탈냉전 이후에도 민족 국가가 국제 사안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로 남을 것은 인정했으나, 주요한 국제정치의 갈등들은 문명 간의 갈등이 촉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헌팅턴은 이 문명과 문명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단층선(fault line)”으로 정의했는데, 이 단층선들이 미래의 전선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Huntington 1993, 22).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테제를 더 자세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어떻게 세계를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범주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헌팅턴은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총 8개의 문명을 제시한다; ① 중화(Sinic), ② 일본(Japanese), ③ 힌두(Hindu), ④ 이슬람(Islamic), ⑤ 정교(Orthodox), ⑥ 서구(Western), ⑦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⑧ 아프리카(Africa)(Huntington 1996, 69-74). 헌팅턴은 저서에서 지도 비유를 들면서 패러다임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는 없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너무 간결한 패러다임은 현실성이 없고, 너무 구체적인 패러다임은 실용성이 없음을 강조한다(Huntington 1996, 43). 나아가, 헌팅턴은 냉전 이후 국제 세계를 바라볼 패러다임 몇 개를 소개한다; 역사의 종언 테제와 민주평화론으로 대표되는 한 세계 패러다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대표되는 두 세계 패러다임, 184개 각 국가들을 세계 사안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인정하는 현실주의 패러다임. 헌팅턴은 한 세계 패러다임과 두 세계 패러다임은 세계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각 국가들을 주요 행위자로 인식하는 현실주의 패러다임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실용성 및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이에 헌팅턴은 세계를 7~8개의 문명으로 구분하여 분석하는 문명 패러다임은 실용성과 경제성 사이의 중간 지점에 들어맞는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다(Huntington 1996, 44-54). 헌팅턴이 주장하는 문명 패러다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세계에는 통합력이 실재하며, 문화적 자기주장과 문명적 자기의식이 저항력을 낳고 있다. ② 세계는 하나의 서구와 다수의 비서구로 나뉘어 있다. ③ 국민국가는 앞으로도 세계 문제에서 중요한 행위자이나, 국가 간 행위는 점차 문화적ㆍ문명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 ④ 세계는 무정부적인 상태에 있으나, 가장 큰 위협을 초래하는 갈등은 상이한 문명끼리의 갈등이다(Huntington 1996, 54).
한편, 헌팅턴은 1993년 논문에서 문명 간 충돌 중 서구와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을 특별히 강조하며 예시를 든다. 헌팅턴은 서구와 이슬람 문명 간의 단층선에서의 충돌 역사는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나다고 언급한다(Huntington 1993, 31). 헌팅턴의 이 주장은 서구와 이슬람 간의 갈등에 역사적인 당위성을 부여하며, 많은 문명 간의 갈등 중 특히 이 갈등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III. 문명의 충돌 테제에 대한 비판
1993년, Foreign Affairs를 통해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자 큰 파장이 일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이 논제에 대한 비판 시도를 해왔다. 본고는 이른바 “문명 패러다임”이 현재 중동ㆍ북아프리카(MENA,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지역을 분석하기에 유효한 논제인지에 대해 집중하여 3가지 층위로 비판 시도를 했다.
1. 과도한 일반화
문명 패러다임은 그 태생부터 과도한 일반화(Over-generalization)의 비판을 내재할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논문을 더 발전시켜 1996년에 출간한 저서를 보면 그러한 요소에 대해 헌팅턴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읽힌다.
우선 헌팅턴이 정의한 문명권의 범주에 대한 비판을 가장 먼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말리아 등을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모두 “아프리카 문명”으로 정의내려졌다. 최근 들어, 악화된 한중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올해로 약 70년간 분단되어온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중화 문명”에 포함시켰다. 동시에 동북아시아에서 비교적 한국과 공유하는 가치가 많은 일본을 하나의 단일 문명권으로 분리시켰다. 인도네시아인 서쪽은 “이슬람 문명”이고 파푸아 뉴기니인 동쪽은 “서구 문명”인 뉴 기니 섬은 더욱 가관이다. 또한, 가톨릭 다수이며 스페인어권인 스페인은 서구로 분류되지만, 마찬가지로 가톨릭 다수이며 스페인어권인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 문명”으로 분류된다(Robinson 2022).
헌팅턴은 하나의 문명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구조를 소속국, 핵심국, 고립국, 단절국, 분열국으로 분류했다(Huntington 1996, 218). MENA 지역을 염두에 두면 문명의 분류 중 소속국과 핵심국에 집중해야 한다. 헌팅턴의 분류에 따르면, 소속국이란 한 문명에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질감을 느끼는 나라이며, 헌팅턴은 예시로 아랍-이슬람 문화권에 완전히 동화한 이집트를 들었다(Huntington 1996, 218). 또한, 핵심국이란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문화적 중심 국가를 일컫는다. 한편, 헌팅턴은 이슬람 문명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는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Huntington 1996, 219).
헌팅턴의 정의에 따르면 한 문명에는 이 문명적 가치를 공유하고 이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소속된 소속국과 이러한 문명적 가치를 주도하는 것은 보통 국력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막강한 핵심국이 한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문명 개념을 MENA 지역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을까? 헌팅턴이 정의하는 이슬람 문명에는 대부분의 MENA 지역과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모리타니, 말리, 니제르, 차드, 수단 등이 포함되며, 동부 아프리카는 탄다니아의 해안 지역들까지 포함된다.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하는 이 광활한 이슬람 문명에는 터키, 이란, 이집트와 같이 독자적인 역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도 있다. 또한, 헌팅턴에 따르면 핵심국 안에는 같은 문명권의 사람들이 소속감을 강화시켜주는 성지와 같은 곳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를 이슬람에서 찾으면 단연 메카와 메디나일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 뿐만 아니라 MENA 지역 전반에서 강력한 국력을 행사하고, 종교적 권위국을 자처하고 있다. 한편, 이란은 헌팅턴이 분류한 이슬람 문명 내에서 이른바 시아 초승달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영향력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터키 또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권에서 이슬람 정체성 뿐만 아니라 튀르크 민족 정체성도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헌팅턴은 이슬람 문명 내부적으로도 시아와 수니의 종파적 갈래가 있다는 점을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의 다양한 민족적 정체성이 있다는 점도 간과했다. 또한, 헌팅턴의 핵심국 정의에 따라 이슬람 문명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나아가 터키 정도도 그 후보로 거론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헌팅턴은 이슬람 세계에서의 국가들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간과하며, 하나의 문명으로 분류했다. 또한, 헌팅턴은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대립점을 조성하기 위해서 이슬람 세계 내부의 갈등을 경시했다. 헌팅턴에 따르면, 문명 간의 갈등이 발발했을 경우, 같은 문명에 속한 친족국(Kin Country)이 갈등에 직면한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다른 동일 문명권 국가들과 함께 결집할 것으로 보았다(Huntington 1996, 38). 단일한 사례를 분석할 때, 파편적으로 이 문명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 사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걸프 아랍국들이 걸프협력회의(GCC, Gulf Cooperation Council)를 통해 공동으로 직면한 위협에 같이 대응할 수는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헌팅턴의 설명에 따르면, 사우디가 직면한 위협에 같은 이슬람 문명 국가인 이란이 동일 문명권의 국가를 위해 지원을 나설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헌팅턴의 이러한 오류는 문명을 더 미시적으로 세분화시키면 해결될 것인가? 헌팅턴은 저서에서 유대 문명 또한 “종교, 언어, 관습, 문학, 제도, 영토 및 정치적 거점 같은 문명으로서의 객관적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평가했다(Huntington 1996, 75). 헌팅턴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문명을 또 하나의 문명으로 따로 분리한 것처럼, MENA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유대 문명으로 따로 분류해보자.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건국 이후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로 줄곧 이어지던 이스라엘-아랍 갈등에 대한 문명 패러다임의 설명력은 확보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및 터키와의 갈등에 대한 설명력도 더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브라함 협정으로 대표되는 최근 이란의 역내 급부상을 통해 위기를 감지한 아랍-이스라엘 협력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국제정치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문명 간 단층선에서 발생한다고 규정한 패러다임은 현실을 지나치게 일반화한 것이다.
2. 문명ㆍ문화적 요소 과대 평가
헌팅턴은 “… 세계 정치에서 주요한 갈등은 서로 상이한 문명의 국가 혹은 단체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세계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에서 주요 갈등 원인이 경제나 사상이 아닌 문화에 있을 것임을 강조했다(Huntington 1993, 22). 이러한 헌팅턴의 시각은 국가의 문화ㆍ종교적 정체성이 다른 집단적 정체성을 상회할 것이라는 그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탈냉전 이후에도 세계 정치에서 유의미한 요인은 민족국가(nation-state)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세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이다(Li 2010, 108).
i) 세계 정치에서 유의미한 행위자로서의 민족국가
헌팅턴은 앞으로의 세계에서 국가가 정치를 운영하는 것에 있어 소속 문명에 대한 정체성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헌팅턴은 국가가 자신들의 국익 혹은 위협을 문명적 단위로 생각하는 경향성이 커지면서 결국에는 비슷한 종교나 같은 문명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국익을 판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정부는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문명적 정체성을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Huntington 1993, 29).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민족국가가 정치를 운영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가 정체성이다. 국가 정체성은 주로 민족주의 담론을 기반으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물론 민족주의는 “상상된” 공동체에 기반하여 민족국가의 틀에 맞게 “발명”되거나 “수정”될 수 있는 개념이나, 민족국가는 이 정체성을 정책 입안 등을 위해 활발하게 활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국익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요소가 외교 정책을 실시할 때이다. 이슬람 문명권의 경우 전통적으로 각 국가들의 정체성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에서 각 국가들이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요인 중 국가 정체성이 이슬람주의 혹은 범아랍주의 정서를 웃돈 바 있다(Russett & Oneal & Cox 2000, 588).
이렇듯 현대 국가에서 국가 정체성은 각 국가의 국익 판단에 있어서 최우선 고려 요소이며, 문명 정체성이 우선할 것이라는 헌팅턴의 가정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ii) 세계 자본주의의 확장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 담론에서 놓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세계자본주의의 확산과 이것이 세계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정치의 세계관에서 국가들은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서로 무역을 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런 상업 행위는 각 국가들을 상호 의존적으로 만드는데, 이러한 자유 무역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각 행위자는 서로 갈등을 벌이는 것이 오히려 국익에 해가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세계관의 논리이다(Baylis 2009, 132).
실제로 탈냉전 이후 다양한 이념을 바탕으로 많은 정치체제들이 등장했으나, 이 국가들 중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무역하지 않는 행위자는 없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인 중국도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무역에 참여한다. MENA 지역에는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인 국가, 각 토 후국들이 연합한 연합국가, 권위주의 국가, 절대왕정 국가 등 정치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종류의 정치체제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MENA 지역 국가들 중에 세계 무역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국가는 없다. 오히려 카타르와 UAE 등은 우수한 지정학적 위치를 앞세워 세계 물류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 정치적 배경을 가진 국가들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와 관련한 부분에 있어서는 각 국가 행위자들이 일정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말인즉슨 문화적 유사성을 가진 국가들끼리도 이권 다툼을 위해서는 갈등을 벌일 수 있으며, “단층선”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끼리도 경제적인 명목하에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헌팅턴의 문명 패러다임은 같은 문명권 내부에서 경제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는 갈등에 대한 설명력을 얻기 힘들다. MENA 지역에는 나일강을 둘러싼 이집트ㆍ수단ㆍ에티오피아 3국의 분쟁, 동지중해 자원갈등 등에 대한 설명력이 떨어진다. 특히, 동지중해 자원 갈등의 경우, 천연자원에 대한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갈등이 주요한 구도인데, 터키와 그리스를 제외한 이 갈등의 이해당사국인 리비아, 이집트, 키프로스 공화국, 이스라엘, 레바논 등의 관계를 주목하면, 협력과 갈등이 꼭 문명의 단층선이라는 단순한 패러다임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지중해 자원갈등에서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문명 내부에서의 갈등과 문명 간의 협력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담론에 대한 훌륭한 반례이다.
3. 스스로 입증한 예언? - 정책 입안자들의 도구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 서론에서 “이 책은 사회과학서가 아니며 그런 의도로 집필하지도 않았다. … 이 책은 학자들이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정책 입안가들이 쓸모 있게 활용할 수 있는,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해석들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공하겠다는 …”이라고 언급한다(Huntington 1996, 19). 헌팅턴은 저명한 학자임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정책 자문가였다. 따라서 헌팅턴이 직접 고백했듯, 문명 패러다임은 순수한 이론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정책 입안자들을 위한 유용한 도구의 성격이 더 강하다. 탈냉전으로 사상의 대립이라는 패러다임이 사장되면서 미국은 앞으로의 세계정치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잃게 되었고,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 패러다임은 이 공백을 메꾸기에 충분했다(Assumpção 2020, 2).
현실주의, 자유주의와 함께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창인 구성주의는 국제 관계를 물질적(tangible)인 요인 뿐만 아니라 역사적 혹은 사회적인 문맥의 관념적(ideational) 요인들의 구성을 통해 설명하는 사회이론이다(Barnett 2018, 89). 구성주의는 사상과 신념이 행동을 구성하고, 이는 곧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과 신념이 변화하면, 행위자들의 사회적 행동도 같이 변화하게 된다(Theys 2018). 구성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헌팅턴의 문명 패러다임을 소개받은 서구의 정책 입안자들이 이슬람을 가능성 있는(potential) 적대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면, 실제 정책에 그러한 경향성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문명 패러다임은 정책 입안자들에게 9ㆍ11 테러의 발생 원인에 대해 너무나도 간편한 설명력을 제공했다(Assumpção 2020, 4).
헤인즈(2019)는 이러한 문명 패러다임이 서구의 우익 정당들의 이슬람혐오적 스탠스에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결과적으로 권력 유지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헤인즈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주요 내각 인사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피데스(헝가리 시민동맹, Fidesz) 정부,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와 그의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 슬로베니아의 자네스 잔사 총리와 슬로베니아 민주당(Slovenska demokratska stranka) 정권 등이 권력 유지에 서구 대 이슬람 프레임을 사용한 사례라고 주장했다(Haynes 2019, 15).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서구 대 이슬람 프레임을 선거운동에 사용한 최신 예로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Rassemblement national)의 마린 르 펜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헌팅턴의 문명 패러다임은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서구 권력자들의 유용한 정치 패러다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입증된 예언(self-fulfilled prophecy)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IV. 결론
본고에서는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의 충돌이 현재의 MENA 지역을 분석하는 것에 유효할지 여부에 대해 문헌적으로 분석을 시도했다. 결론적으로 헌팅턴의 문명 패러다임은 총 3가지 측면에서 비판점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문명 패러다임은 국가들을 각각 하나의 문명으로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일반화가 진행되어,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설명력이 간과되었다. 둘째, 문명 패러다임은 세계 정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문명ㆍ문화적인 요소를 과도하게 강조하여 국민국가 정체성, 세계 자본주의와 같은 더욱 실질적인 요소를 변인화하는 것에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문명 패러다임은 그 자체로 서구 정치권의 이슬람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MENA 지역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치부되기에는 내부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갈등 양상이 진행되고 있으며, 반대로 탈냉전 이후 세계화에 힘 입어 문명 간의 협조체계도 많이 목격되고 있다. 문명 간의 충돌 담론은 사상 대결이 사실상 종료된 탈냉전 시기에 실종된 갈등 패러다임을 단편적으로는 분석하는 것에 괜찮은 설명력을 가질 수는 있었으나, 헌팅턴 자신도 이 패러다임에 관해서 “사회과학”이라는 명칭은 사용하기 꺼려했을 정도로 일반화하기에는 힘든 측면이 있다. 따라서 문명의 충돌 논제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를 상정해야 하는 현대의 MENA 지역을 분석하기에는 매우 단편적인 설명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본고의 결론이다.
참고문헌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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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lis, John, & Smith, Steve, & Owens, Patricia(2009). “세계정치론(하영선 외 역)”, 서울, 을유문화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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